형사사건 중에서는 난이도가 높은 재산·금융사건, 예를 들어 배임, 횡령, 자본시장법 위반 사건이 있는데 위와 같은 사건들은 보통 읽고 분석해야할 자료가 몇 박스에 이르는데, 승소를 하기위해서는 그 자료들을 잘 분석해 내고 핵심을 파고들어야합니다. 반면 상해, 폭행, 성범죄 등 몸을 사용한 범죄의 경우에는 그와 달리 사건 당시의 상황과 경위, 목격자 등의 증인을 잘 캐치해야 합니다. 오히려 이런 범죄들이 무죄를 다투어 변론을 하기에 더 어렵다고 봐야겠죠.
상해진단서 제출 차이로 죄목이 달라져
형사범죄에는 반의사불벌죄(反意思不罰罪)와 친고죄가 있습니다. 반의사불벌죄라는 것은 피해자가 경찰에 신고, 고소를 하지 않아도 수사기관이 수사해서 재판을 받게 하는 등 처벌할 수 있는 죄이지만, 그 과정에서 피해자가 처벌을 원치 않는다는 의사표시를 표명할 경우 처벌을 못하는 죄를 말합니다. 폭행죄가 대표적인데, 폭행사건과 상해 사건의 차이는 똑같이 맞았어도 상처를 입었느냐의 여부에 따라 달라집니다. 즉 상해진단서가 있으면 폭행죄가 아닌 상해죄로 처벌하는 것이죠(폭행치상죄로 처벌하는 경우는 드물고 상해죄로 처벌합니다). 헌데 앞서 말한 것처럼 폭행죄는 반의사불벌죄이므로, 피해자와 합의만 되면 처벌을 받지 않지만, 상해죄는 피해자와 합의가 되더라도 처벌받게 됩니다. 상해진단서라는 서류 하나의 제출여부 차이로, 합의를 하고도 전과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폭행죄보다 상해죄의 처벌수위 자체가 높습니다. 폭행죄에 해당하는 경우에는 2년 이하의 징역, 500만원 이하의 벌금, 구류 또는 과료에 처하는 반면 피해자가 상해를 입어 상해죄가 성립하는 경우에는 7년 이하의 징역, 10년 이하의 자격정지 또는 1천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게 됩니다.
폭행사건이 일어난 뒤 상해진단서가 고소장에 첨부되거나 법정에서 제출되면, 일단 가해자가 이의를 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검사든 판사든 상해사실을 인정할 수 밖에 없습니다. 사람의 생명을 다루는 전문가의 의견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가해자 측(피고인)이 이의를 제기하더라도, 특별한 사정이 없으면 그들은 상해진단서를 믿습니다. 형사재판에서 피고인의 변호인이 이 상해진단서를 증거로 인정하지 않는다고 하면, 재판장이나 공판검사의 표정이 굳어지고, 변호인에게 강렬한 눈빛을 보냅니다. 재판장은 “꼭 진단서를 증거로 하는데 부동의 하셔야 겠습니까?”라고 묻는다. 변호인이 진단서를 증거로 하는데 동의하지 않으면, 의사를 법정에 불러서 진단서를 진정하게 작성한 것인지를 물어야 하는 번거로운 절차를 거쳐야 하기 때문입니다.
상해진단서의 증거능력을 부정하는 것이 쉽지 않은 이유
의사들은 병원에 매여 있는 몸이고 굉장히 바쁜 직군 중 하나이기 때문에 도통 법원에 증인으로 나오려고 하지 않습니다. 법원에서 증인 출석 거부에 대한 과태료를 부과한다고 해도 이를 간단히 무시하고 출석을 하지 않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이런 과정이 반복되다보면 결국 재판이 지연되므로 법원에서는 변호인이 상해진단서를 증거로 하는 것에 동의하지 않을 때 불쾌할 수 있겠죠.
피고인의 입장에서 자신이 가한 폭행이 경미한데도 상대방이 상해를 입었다고 나오면 당연히 불신의 감정이 들 수 있습니다. 이런 불신의 원인이 되는 것이, 형사사건에서 많이 등장하는 이른바 ‘2주 짜리 상해진단서'인데 상해진단서에 기재되는 상해의 일시·장소, 상해의 원인은 환자의 진술에 따라 기재하기 때문에 환자가 상처가 난 원인을 ‘타인의 구타’라고 말하면 의사는 그대로 상해진단서에 기록합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이렇게 졸속으로 만들어진 상해진단서 한장도 재판에서 큰 효력을 발휘하는 것이죠.
의사 입장에서 진단서 작성은 의무
의료진 입장에서 진단서 작성은 '의무'이고 환자가 호소하는 증상을 무조건 무시하기에는 분명히 현실적 어려움이 있습니다. 국립경찰병원 이승림 진료부장(정형외과)은 "수사 기관은 제발 1주일짜리 진단서를 내지 말아달라고 한다"며 "진단서를 내면 불법적 사실이 인정돼 기소를 해야 하고 수사를 진행해야 하니 기간이 짧은 진단서는 안 낼 수 없냐고 물어올 때가 있다"고 말하기도 했는데, 그러면서 "의사 입장에서는 진단서를 쓰는 게 의무"라며 "진단서 기간이 며칠 안 나온다고 하면 환자는 정상이라고 확신할 수 있냐고 되묻고, 그럼 또 거기에 대한 답변은 못하기 때문에 진단서를 쓸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토로했습니다.
상해진단이 2주가 나왔다고 2주를 입원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환자가 아프다고 진술하는 부위나 상처가 난 부위를 의사가 진단하고, 완치까지 대략 2주일 정도 걸리겠다고 예측한 것이 바로 2주짜리 상해진단서입니다. 의사가 2주라고 예측을 했어도, 1주일 만에 완치가 될 수도 있고, 3주가 걸려 완치가 될 수도 있습니다. 예측인 것이죠. 그리고 상해부위와 관련하여 논란이 되는 것이 “요추부 염좌”, “경추부 통증” 같은 것입니다. 요추부 염좌는 허리가, 경추부 통증은 목이 아픈 것을 말합니다. 이 부분은 평소 때도 디스크 등의 문제가 있을 가능성이 높은 부위이다 보니, 피고인의 입장에서는 2주짜리 상해진단서를 불신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상해진단서에 대한 불신은, 재판에 대한 불신, 나아가 우리나라 사법체계 자체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집니다.
이런 상해진단서에 대한 의미있는 판결이 있습니다. 사안은 다음과 같습니다.
피해자는 폭행 사건이 있은 후, 병명이 ‘요추부 염좌’로 기재된 2주짜리 상해진단서를 가지고 사건이 발생한 후 7개월이 지난 후에 피고인을 고소하였는데 피해자는 병원에서 치료만 받고 진단서를 발급받지 않았다가 고소일 직전에 상해진단서를 발급받았습니다. 당연히 재판에서는 내내 이 상해진단서의 신빙성이 문제되었죠.
피해자를 진단한 의사는 ‘피해자가 요추부 동통을 호소하였기 때문에 요추부 염좌로 진단한 것이며, 통증은 환자가 호소하는 대로만 기록하고 환자가 허리가 아프다고 하면 요추부 염좌 2주 진단은 얼마든지 나갈 수 있다’는 취지로 진술했고 피해자는 문진과 방사선 촬영검사 외에 물리치료 등 그가 호소하는 통증에 대하여 별다른 치료를 받은 바가 없었습니다. 처방받은 약품도 구입하지 않았으며, 이후 다시 병원을 방문하거나 허리 부위와 관련하여 치료를 받은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죠.
대법원은 위 사건에서 상해진단서의 증명력을 부정하며, “상해진단서가 주로 통증이 있다는 피해자의 주관적인 호소 등에 의존하여 의학적인 가능성만으로 발급된 때에는 그 진단 일자 및 진단서 작성일자가 상해 발생 시점과 시간상으로 근접하고 상해진단서 발급 경위에 특별히 신빙성을 의심할 만한 사정은 없는지, 상해진단서에 기재된 상해 부위 및 정도가 피해자가 주장하는 상해의 원인 내지 경위와 일치하는지, 피해자가 호소하는 불편이 기왕에 존재하던 신체 이상과 무관한 새로운 원인으로 생겼다고 단정할 수 있는지, 의사가 그 상해진단서를 발급한 근거 등을 두루 살피는 외에도 피해자가 상해 사건 이후 진료를 받은 시점, 진료를 받게 된 동기와 경위, 그 이후의 진료 경과 등을 면밀히 살펴 논리와 경험법칙에 따라 그 증명력을 판단하여야 한다.”고 기준을 제시하였습니다.
이 판결은 상해진단서의 증명력에 대한 기준을 제기해 주는 상당히 의미 있는 판결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만 여전히 실무상 상해진단서의 증명력을 부정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사건을 맡은 변호인 입장에서 가해자와 피해자를 막론하고 재판의 흐름을 바꾸기 위해 잘 활용할 필요가 있겠죠.
법무법인 오른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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